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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방랑詩 -나그네 가는 길에 詩가 있어](18)인정은 어디를 가도 있구나.
人生到處有靑山(인생도처유청산)
이상호 칼럼니스트   |   2024-03-27
▲ 이상호 칼럼니스트(소소감리더십연구소 소장, 전) 천안월봉고등학교 교장     

홍련의 품속을 파고들다 잠이 든 김삿갓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홍련이었다. 

 

“선생님 어서 일어나셔요. 낮이 되면 출타한 식구들이 옵니다. 그 이전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해야 해요.” 

 

홍련은 이미 깨어나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김삿갓은 일어나 의복을 바로 하고 객방(客房)으로 갔다. 홍련의 방에 있으면 모두가 탄로가 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김삿갓은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홍련에게 후한 대접을 받았다. 

 

 김삿갓은 스스로 곧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홍련의 집에 올 때도 지나가는 길에 하룻밤 묶어가려 한 것이었다. 결코 지금 이 집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어젯밤에 홍련이 읊은 시를 떠 올렸다. 그리고 지필묵을 꺼내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며 내려갔다.

 

昨夜狂蝶花裡宿(작야광접회리숙)

今朝忽飛向誰怨(금조홀비향수원)

 

지난밤 미친 나비 꽃 속에서 자고

오늘 아침 홀연히 날아가 버리니, 누구를 원만하리

 

어젯밤 홍련이 들려준 시에서 몇 글자만 바꾸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어젯밤엔 미친 나비인 자신이 꽃인 홍련의 품속에서 자고, 아침에 되어 홀연히 떠나버리니 누구를 원망하리’ ‘홍련이여, 그대도 나와 통하여 동침하였으니 나를 원망하지 말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어쩌면 좀 뻔뻔한 듯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담긴 이별의 시(詩)였다. 

 

김삿갓은 이 시를 써서 곱게 접어 홍련의 방으로 들어가 문갑에 올려놓고 나왔다. 이제 떠날 준비를 하는 일만 남았다. 가지고 다니는 것이야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도 꾸릴 것은 꾸려야 했다. 거의 다 꾸릴 무렵 홍련이 와서 말했다. 

 

“선생님, 진지 드시지요.”

 

차려진 밥상이 눈이 휘둥그레지게 하는 진수성찬이었다. 김삿갓은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하면서 “언제 이렇게 많은 찬을 마련하였소?”라고 하고는 어차피 떠날 몸이니 배를 가득 채우자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먹었다. 그리고 홍련이게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는 참으로 좋았고 고마웠소. 그런데 나는 지나가는 과객이고 또 갈 길이 머니 오늘은 떠나야 하는 몸이요. 내가 떠나도록 허락해 주겠소?”

 

사실 홍련이 허락하지 않아도 떠날 몸이었다. 이미 김삿갓은 떠날 채비를 모두 완료한 참이었다. 그것을 모를 홍련이 아니었다. 홍련은 이미 김삿갓이 날이 새면 떠난다는 것을 예측한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들은 홍련이 잠시 부엌으로 가더니 보자기 하나를 가지고 나와 건네주었다.

 

“가시다가 시장하면 드세요”

 

도시락이었다. 김삿갓은 그것을 받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겼다. 가던 길을 수없이 돌아보며 지난밤 홍련과의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되뇌었다. 김삿갓은 지금까지 수많은 만남과 이별이 있었지만 홍련과의 만남과 헤어짐은 유별나게 꿈 같았다. 기생이라지만 대부분 몇 차례 수작을 부리고 공을 들여야 밤을 함께 할 수 있었건만 홍련은 달랐다.

 

그런데 옛날 친구 이군(李君)이 홍련은 재주가 뛰어난 기생인데 자존심이 강하여 그 어떤 사내에게도 몸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나에겐 그토록 쉽게 마음과 몸을 연 것일까? 그리고 이토록 후하게 대접한 것인가? 그런데 사실은 홍련이 김삿갓의 명성을 듣고 그녀 스스로 삿갓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수록 김삿갓은 홍련이 더욱 고맙고 미안했다. 

 

산등성을 두어 개 지났을까? 해가 중천을 지나고 있었다. 시장기가 몰려왔다. 김삿갓은 가던 길을 멈추고 풀밭에 주저앉아 홍련이 싸 준 도시락을 열었다. 도시락 안에는 밥은 물론 북어무침, 계란말이 등 온갖 것들이 소복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김삿갓은 또 한 번 홍련의 정성에 감동하여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人生到處有靑山인생도처유청산   

 

‘人生到處有靑山(인생도처유청산)-인정은 어디를 가도 있구나.’ 김삿갓은 홍련이 싸 준 도시락을 천천히 애써 다 먹었다. 그리고 또 중얼거렸다. ‘만남과 이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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