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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학 칼럼] 한일가왕전 대한민국 7인의 신부들 !
정재학 칼럼니스트   |   2024-04-14
▲ 정재학 시인, 칼럼니스트     

 한일가왕전 대한민국 7인의 신부들 ! 

 

어느 예술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트롯도 민족성에 뿌리가 있다. 다치고 넘어진 사람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는 정(情)과 사랑하면서도 끝내 붙잡지 못하는 한(恨), 그리고 신분과 귀천을 가리지 않는 어울림의 합(合), 즉 조화로움이 우리의 뿌리였다.

 

비빔밥이 그런 음식이었다. 온갖 채소와 잡다한 나물과 밥, 그리고 장(醬)이 어울리는 조화로움. 우리의 노래엔 정과 한과 합이 비빔밥처럼 비벼져 있었다. 그래서 노래에 따스함과 눈물과 해원(解寃)이 동시에 느껴지는 것이다.

 

애국가를 들으면서 뜻모르는 눈물을 흘리는 외국인도 있음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노래에 담겨진 전통의 정서가 인류의 보편적 정서에 닿아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바로 이 점, 정서의 공유가 우리의 한류를 세계로 이끌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들에겐 정서의 다채로움과 다양성이 부족하다고 본다. 파란(波瀾) 많은 역사에 대한 경험이 적기 때문일 것이고, 유구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유라시아로부터 건너온 대륙의 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특히 사무라이 문화에 가둬진 일본여인의 정서는 순종일 수밖에 없다. 노래에 그러한 복종의 정서가 보인다. 정서가 사회제도에 닫혀져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크나큰 결점이다. 안타깝지만,  일본문화가 세계화 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그러나 정서가 그렇다 해서 일본 노래가 아름답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박혜신이나 별사랑과는 노래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일본인들도 느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가수들은 박혜신의 '기다리는 여심'이나 별사랑의 '빈잔'과 같은 노래는 부를 수 없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만약 남자가수들만의 한일가왕전이 이루어진다면, 이 차이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기량은 비슷할 수 있으나 감성을 사로잡는 가슴의 차이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으리라.

 

▲ 한일가왕전  참가 가수등

 

 박혜신을 예로 들어본다. 박혜신은 현역가수 중 자신의 노래를 가장 멀리 보내는 가수다. 소리가 크다는 뜻이 아니다. 대부분의 가수는 청중의 귀와 가슴에 노래를 보내지만, 박혜신은 온몸을 짓누르며 마지막 한방울까지 청중들의 가슴 밑으로 스며들게 하는 여인이었다. 

 

허스키한 목소리에서 각고의 노력이 보이고, 무엇보다 그녀는 어깨로 노래를 하고 있었다. 온몸을 짓누르며 짜내는 들기름 같은 노래였다. 그리하여 그녀의 커피색 목소리와 은은히 배어드는 커피향은 다만 독특하다고만 평가할 수는 없었다. 박혜신은 오랜 세월 노래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커피색으로 발효시킨 여인이었다. 박혜신의 노래는 소리가 아니라 색깔이었고, 어깨로 부르는 노래였으며, 온몸으로 전하는 눈물이었다.

 

 김다현은 우리 전통가요의 표본이다. 비록 어린나이지만, 다현의 노래는 끊고 맺는 호흡이 단정하다. 풀다가 감아드는 물레소리를 듣는 느낌. 때론 심연(心淵)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단전(丹田)의 뜨거움을 느끼게 한다. 

 

춤사위 또한 범상치 않다. 두 어깨로부터 나오는 흥이 손가락 끝에 전해져 사방 주위 공기를 휘젓는 파동이 있고, 전해지는 감흥이 있다. 밀물처럼 밀려오고 썰물처럼 밀려가는 소리. 때론 폭풍우처럼 천년 느티나무를 휘감는 다현의 노래에서, 우리는 억만년 백의민족의 숨소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이진을 보면서 대한민국 트롯의 반석을 보았다. 그녀는 트롯의 길을 걸으며, 모래와 자갈과 숯으로 만든 삶의 정수기 속에 자신을 여과시킨 샘물과 같은 여인이었다. 끝없이 흘러나오고, 마시면 약(藥)이 되는 물. 상선약수(上善若水), 어느곳 어디에서도 물이 되어 흐를 줄 아는 사람. 물길이 막히면 물길을 만들고, 바위를 만나면 돌아서 가고, 거친 돌멩이를 안고 흐르다가 어느새 예쁜 조약돌을 만드는 사람. 

 

겨울의 시련 속에서도 강한 의지로 맨먼저 꽃을 피우는 산수유나무 같은 것. 마이진은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었고, 무대를 지배하는 능동(能動)이었다. 우리 가요계의 든든한 기둥이 분명하였다.

 

 린은 자신의 모든 것을 노래에 실을 줄 아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음률에 실어 보내는 진정한 가인(歌人)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린의 노래에서 세상에 대한 어떤 반항도 거절도 없는 착한 선의(善意)를 본다. 따라서 우리는 린의 노래 앞에서는 저항을 포기하고 무장을 해제할 수밖에 없다. 

 

그녀가 이번에 부른 '북녘의 숙소에서'란 노래가 원곡보다 더 진한 감동을 주는 이유가 그렇다. 노래에 몸을 실을 줄 알기에 원곡의 흐름에 모난 산맥이 다듬어지고, 노래에 곡선이 일어나며,  하늘 저 먼 곳을 향하여 새로운 하늘길이 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가 노래를 부를 때, 나는 그녀의 혀를 본다. 영어의 R 발음이 사라진 그녀의 발음에서 다시 한번 모진 노력의 흔적과 끈기와 인내의 과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는 더이상 외국인일 수 없었다.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난 마리아. 그 해맑은 해당화꽃 같은 화려함과 그녀의 노래에 담겨진 우리의 사랑과 맥박과 호흡과 웃음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별사랑은 가슴의 온기(溫氣)로 노래하는 살가움이었다. 누군가의 닫힌 마음 속으로 문을 열고 들어갈 줄 아는 별사랑은 고독과 냉정을 품어줄 줄 아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노래에는 낯선 거리에서 갈 곳 몰라 서성이는 나그네의 손을 잡아주는 따스함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올 가을 계절이 바뀌면 별사랑의 노래를 온종일 듣고 있을 것도 같다. 찬바람이 불수록 별사랑이 부르는 노래의 온기가 그리워질 것이므로, 산다는 것이 행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천재는 하늘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인간의 힘이 닿지 못하는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주는 초월적 재능은 축복일 수밖에 없다. 전유진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이해가 불가능한 천부(天父)의 뜻을 헤아린다. 전유진은 인간의 아픔을 다스리는 치유의 능력이 있다. 아무리 분노에 사무치더라도 전유진의 노래를 듣노라면 평온해진다. 

 

그동안 나는 패티김 이후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패티김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이번 한일가왕전에서 패티김의  '사랑은 생명의 꽃'을 전유진의 노래로 들으며, 그것이 패티김의 부활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리하여 전유진이 펼치는 노래의 세상 속에는 아픈 장미가시가 없고, 궂은 날이 없으며, 돌아서서 떠나는 이별이 없다. 그래서 나는 전유진을 떠날 수 없다. 유진도 우리 소원 곁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믿는다. 

 

한일가왕전을 보면서, 또 어딘가에서 성장하고 있을 다음 천재를 기다린다. 그 천재들은 나의 뒤를 이을 세대가 맞이할 기쁨일 것이지만, 더 크고 더 아름답고 더 따스할 것을 믿는다.

 

2024. 4. 14.

전라도에서 시인 정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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