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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칼럼] 정치적 리더십은 경험과 이력에서 나오는가?(2)
[4.10 총선 후보자와 유권자에게 보내는 메시지] 성공한 대통령 케네디와 실패한 대통령 닉슨의 사례를 보며
이상호 칼럼니스트   |   2024-02-21
▲ 이상호 칼럼니스트, 소소감리더십연구소 소장     

 3. 성공한 대통령 케네디와 실패한 대통령 닉슨의 사례를 보며 

 

정치적 리더십은 경험과 이력에서 나오는가? 의 문제를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어록에서부터 출발했으니, 오바마의 말로 시작하겠습니다. 오바마는 나이 든 사람, 경험이 풍부한 정치인의 맹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신의 결점에 익숙해지기 마련인데, 가령 늘 같은 식으로 생각하는 버릇의 경우 맹점이 되기도 한다. 이런 맹점은 타고난 것이고나 자란 환경 탓일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진다. 절름거리는 걸음걸이가 틀림없이 고관절의 통증으로 이어지는 것만큼이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런 성격상의 결점이 더 나빠질 것이 분명하다”(버락 오바마 지음, 홍수원 옮김 『담대한 희망』 p 6)

 

 이 말은 경험(이력)이 화려한 사람은 자신의 이력을 믿고 타성에 익숙해져 결점을 깨닫지 못하는 고집이란 고질병에 걸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맞습니다. 역사상 오래된 집권자들일수록 자기의 타성에 빠져 결점을 보지 못하고 권위와 권력의 자아도취에 빠져 독재와 독선, 거짓의 리더십을 발휘하기 쉽니다. 그것은 리더십이 아니라, 욕망입니다.

 

그 사례를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의 성공과 닉슨 대통령의 실패를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 케네디 대통령의 닉슨 대통령(사진 왼쪽부터)     © 경기데일리

 

오늘날 미국인들은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M. 닉슨, 두 대통령을 정반대의 인물로 기억합니다. 케네디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미국인들의 추앙을 받지만, 닉슨은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중도에 하야한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억합니다.

 

 나이는 닉슨이 몇 살 위입니다. 당시 그들은 촉망받는 젊은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들은 탄생과 성장은 정반대의 환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케네디는 1917년 5월 29일 미국 매사추세츠 부룩클린에서 미국의 전설적인 부호 조셉 P. 케네디와 저명한 보스턴 정치가의 딸 로스 F. 케네디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은행과 월가 등 다양한 사업에서 35세의 이른 나이에 이미 백만장자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케네디가 10세쯤 되었을 때 영화 산업에도 뛰어들어 많은 돈을 벌었고 인간관계의 폭도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는 사생활이 그리 건전하지는 않았지만 9명의 아이들이 각각 21세가 되면 사용할 수 있는 신탁기금을 최소 백만 달러씩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주영국 대사까지 역임하였습니다. 이를테면 금수저였습니다.

 

 케네디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정치가로 만들기 위해 많은 지원을 하였으며 특히 장남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장남이 1944년 프랑스 상공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여 죽는 바람에 차남인 존. F. 케네디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존. F. 케네디는 미국 코네티컷에 있는 상류층 학교인 차터스쿨에 입학하여 1935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는 바람에 ‘대통령이 될 가장 큰 인물’이라는 좋은 평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영국 런던 경제학부에서 공부하였고 다시 돌아와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1940년 하버드에서 졸업 논문으로 나치독일의 위험성에 관한 논문인 《왜 영국은 잠자고 있는가 Why England Slept》로 좋은 평판을 받았으며, 그것은 책으로 편찬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허약한 체질이었습니다. 젊은 날 척주 질환, 대장염 등 질병으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1941년 해군에 입대하여 초계정 PT-109의 선장으로 남태평양 실전에 참전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구축함과 충돌해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는 밤새 부상당한 병사들을 구출해 안전하게 적은 섬으로 옮겼으며 이 공적으로 해군 및 해병대 훈장을 받았습니다. 미국 시민들은 그를 칭찬했으나 전문가들은 그가 유능한 지휘관이라면 작고 기동성이 뛰어난 함정이 구축함에 충돌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케네디의 사생활은 엄청난 부를 바탕으로 하였기에 그리 근면하지 못했으며, 또한 여자를 밝히는 바람둥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닉슨은 캘리포니아 출신의 가난한 집안의 소년이었습니다. 닉슨은 1913년 1월 9일 캘리포니아 요바 린다에서 프랜시스 닉슨과 한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가족은 닉슨이 10세되었을 때, 휘티어로 이사를 했지만, 밥 먹고 살 정도의 살림살이에서 자랐습니다. 닉슨은 어린 시절부터 똑똑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따라 퀘이커 교도였고 종교적 계율에 따라 음주, 무도, 욕지거리, 흡연 등을 멀리했습니다.

 

 닉슨은 휘티어고등학교를 2등으로 졸업할 만큼 열심히 공부했으며 하버드대학에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집안이 넉넉하지 못해 하숙비를 댈 수가 없어 포기하고 휘티어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가난했기에 고급 사교클럽인 프랭클린스에도 가입을 거절당할 정도였기에 자기 수준에 맞는 사교클럽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1936년 닉슨은 듀크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3등으로 졸업했는데 당시 동료들은 그가 밤을 새워 공부했기에 그에게 ‘무쇠 머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2차 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해군에 입대하여 보급장교로 남태평양에서 근무했으나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군 생활 중 카드놀이를 해서 10,000달러를 벌어 1945년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돈은 나중에 그가 정치활동을 하는데 큰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케네디와 닉슨 모두 정치적 야망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케네디가 29세 닉슨이 33세인 1946년 같은 해에 나란히 하원의원이 되었습니다. 케네디는 보스턴 출신 하원의원이 보스턴 시장 출마로 하원의원직을 사퇴하는 바람에 어렵지 않게 당선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케네디는 선거구 전역에 돈을 뿌렸다고 알려집니다.

 

 그리고 당시 미국은 미국 전역에 스며든 소련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으로 골치를 앓고 있었으며 미국 시민들도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케네디는 민주당 내에 침투한 좌익세력을 약삭빠른 소련 선동주의자들이라며 강하게 공격하였고 이것이 잘 먹혀들어 73%의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닉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46년 허먼 페리라는 부유한 은행가 지기가 닉슨에게 하원 출마를 권유하며 후원을 약속했습니다. 닉슨은 마침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캘리포니아 남부 제12 하원 지역구에 도전하여 5기 연임을 한 민주당 하원의원 제리 부리스(Jerry Voorhis)와 대결하여 그를 제치고 하원에 진출합니다.

 

 닉슨도 미국 전역에 퍼지는 공산주의 세력을 이용했습니다. 닉슨은 부리스와의 선거 토론에서 민주당 부리스가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서류를 제시하며 흔들며 부리스에게 그것을 읽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때 부리스는 뜻하지 않은 닉슨의 반격에 더듬거렸고 대중은 닉슨을 선택하여 56% 득표로 당선되었습니다.

 

케네디와 닉슨은 의정활동 중 소속 정당은 달랐지만, 약간은 친한 사이였으며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들은 가까운 거리에 사무실을 두고 있으면서 닉슨은 케네디가 허리 등의 치료로 힘들 때 격려의 편지도 주었고, 케네디 역시 닉슨을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의원 활동 중 케네디와 닉슨은 둘 다 능숙한 토론자였습니다. 케네디는 항상 밝고 미소 띤 모습에 깔끔하고 미남 스타일의 난봉꾼 총각이었으며, 닉슨은 대학 시절 동료들이 붙여 준 별명처럼 늘 성실한 모습이었으며 가정적이었습니다.

 

닉슨은 항상 일에 빠진 덥수룩한 모습이었으며, 늘 일에 파묻혀 살았으며 서류 뭉치를 집에까지 가지고 가서 처리하는 일벌레였습니다. 반면 케네디는 깔끔한 스타일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케네디는 여자에게 배려심이 많은 바람둥이라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케네디는 늘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둘의 하원의원 생활에서 케네디는 평판을 받지 못한 반면, 닉슨은 승승장구했습니다. 닉슨은 미 하원 반미활동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국무부 관리인 앨저히스 등의 소련을 위한 간첩행위를 밝혀내는데 성공했고, 텔레비전으로 미국 전역에 알려지게 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그는 1950년 캘리포니아에서 상원 의원에 출마하여 민주당 후보인 헬렌 가건 더글라스를 물리쳤습니다. 이 선거에서 닉슨은 흔히 말하는 색깔론을 들고나와 상대 후보인 헬렌 가건 더글라스를 소련 동조자라 비난하면서 ‘핑크 레이디’ ‘속옷까지 핑크색’이라 비난하였고 그것은 먹혀들었습니다.

 

 그로 인해 헬렌을 물리치고 당선되었지만, 닉슨에게는 ‘교활한 딕’이란 별명이 붙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닉슨은 선거에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 닉슨이 순식간에 공화당의 중심인물로 부각 되는 데는 손색이 없었습니다. 2년 후 닉슨은 아이젠하워에 의해 부통령 후보로 선택되었고 연속하여 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때까지 닉슨의 정치적 길을 탄탄대로였습니다. 

 

케네디는 보잘것없는 상이지만 ‘가장 잘생긴 하원의원 상’을 받았고 닉슨보다 늦은 시기인 1952년 매사추세츠에서 핸리 캐봇 롯지를 물리치고 상원에 입성하였습니다. 케네디는 일찍이 텔레비전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정치인으로서의 텔레비전 활용에 대한 연수를 받았고 이에 대한 공부도 했습니다. 케네디가 상원의원이 되었을 때 닉슨은 상원 의장의 지위였으며 뒤이어 부통령이 되었습니다.

 

 케네디 역시 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 스티븐슨을 지원했으나 되지 못했고, 스티븐슨 역시 아이젠하워에게 패배했습니다. 이렇게 케네디와 닉슨의 정치적 이력에는 큰 차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스티븐슨은 계속 닉슨을 공격했기에 뒷날 케네디와 닉슨의 대결에 기반을 다져준 셈입니다. 

 

1960년 둘이 미국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을 때 둘의 정치적 경험과 이력은 큰 차이가 났습니다. 케네디는 상원의원이었고 닉슨은 부통령이었으며, 케네디는 미국에서 선호하지 않는 가톨릭교도였고 닉슨은 청교도 계열의 퀘이커 교도였습니다. 그러나 케네디는 텔레비전의 중요성을 알기에 언론에 능숙하였으며 닉슨은 일에 치여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케네디는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갔습니다. 당시 케네디가 경량급이었다면 닉슨은 헤비급이었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닉슨은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을 자신을 역설하였고, 케네디는 닉슨의 허점을 노리며 아이젠하워의 8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뉴프런티어’를 슬로건으로 선택하여 공략에 나섰습니다. 선거운동 기간에 닉슨은 50개 주를 비행기로 종횡무진 뛰어다녔고, 케네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케네디의 지원에 나선 전직 대통령 트루먼은 닉슨을 중고차에 비유하면서 닉슨을 선택하면 ‘지옥에 갈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판세가 케네디에게 기울지는 않았습니다. 그만큼 닉슨의 유명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거운동 시간 내에 지나치게 바쁘게 돌아다니는 닉슨은 버지니아 등의 유세에서 자신을 제퍼슨에 비유하는 실수를 하였고 그 바람에 비난을 받았으며, 케네디는 그런 닉슨을 ‘더럽고 거짓말쟁이인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라고 공격했습니다. 케네디는 상당히 당당하고 솔직하게 대중에게 다가갔습니다. 

 

이 두 사람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것은 미국 선거 역사상 최초로 도입된 텔레비전 토론이었습니다. 최초의 토론인 시카고 토론 때 케네디는 하루 반 전에 가서 호텔에서 토론 준비와 휴식을 하며 자신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주력했습니다. 반면 닉슨은 11주를 돌아다니며 바쁘게 돌다가 전날 저녁 늦게 피로한 모습으로 호텔에 도착하여 늦은 밤 여섯 시간이나 토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는 바삐 돌아다니다가 무릎을 다쳐 고통을 겪고 있었으며 그것은 사람들에게 찌푸리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 토론에서 케네디는 여유 있게 많은 준비를 하였기에 미남 인상을 깔끔하게 하고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논리로 닉슨을 눌러버렸습니다. 피로에 지치고 창백한 모습의 닉슨은 600만 시청자 앞에서 시작부터 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토론에서 유권자들은 43%가 케네디가 이겼다고 했고 29%는 비겼다고 했으며 23%는 닉슨이 이겼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진행된 최종 선거에서 케네디는 닉슨을 11만9,450표 차이로 승리했는데 이것은 비율로 보면 0.1%의 근소한 차이였습니다. 

 

케네디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 최초의 가톨릭 신자 대통령 등의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 집권 내내 한 달에 한 번 이상(평균 17일에 한 번으로 알려짐) 기자들과 생방송으로 인터뷰했으며, 쿠바 문제 해결, 아폴로 계획을 통한 우주 발전의 기틀 마련 등 다양한 문제 해결과 뉴프런티어 정책의 추진에 최선을 다하여 미국이 세계의 절대 강국이 되는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케네디는 날이 갈수록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책 수행에서 진영을 초월하여 거침이 없었으며 항상 이전의 실패를 성찰하면서 중요한 문제는 난상토론을 통해 최종 의사결정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63년 11월22일 현지 시각으로 오후 12시 30분 유세지인 텍사스주 댈러스시 다운타운에서 컨버터블로 퍼레이드를 벌이다가 총탄을 목과 머리에 맞고 저격당해 숨을 거두었습니다. 

 

케네디의 죽음에 대해 미국인들은 큰 슬픔으로 애도했다. 사람들은 케네디를 평가하기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등과 함께 미국 민주당을 대표하는 존재이자, 미국 진보층과 민주당 지지자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대통령이라고 했다. 그의 재임 시절은 대단히 신중하였고 담대했으며 언론 등에 솔직했습니다.

 

그는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으라”고 하며 강조한 뉴프런티어 정신 등에서 미국인들에게 큰 정치적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케네디를 2차 대전 이후 진영을 초월한 인기를 누리는 대통령으로 존중해 왔습니다. 

 

 반면에 닉슨은 1960년 케네디에게 패한 이후 한동안 정치적 하향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도전했지만 실패하였고, 한참 동안 정치적 위기를 겪다가 베트남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196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를 근소한 차이로 이기면서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재임 중에 베트남 전쟁을 종결 짓고 미국인 포로를 석방했으며, 아폴로 11호의 달착륙으로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도록 하였으며, 1972년 중국을 방문해 대중 데탕트의 길을 열었습니다. 1972년 대선에서 50개 주중 49개 주에서 승리하며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972년 대선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류되어 사건의 은폐와 조작, 수사 압력 등으로 대법원의 위법 판결을 받았습니다. 1974년 미국 의회는 닉슨의 탄핵을 추진하였고, 탄핵의 성사가능성이 높아지자 제럴드 R. 포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진행되는 동안에 그는 사임했습니다. 

 

닉슨의 사임 이후 한동안 미국의 보수 공화당은 상당히 위축되었다. 닉슨은 재임중 상당한 업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에게는 정직하지 못한 대통령, 거짓말쟁이 대통령으로 낙인되었습니다. 실제로 닉슨은 오랜 정치 생활에서 자기방어 기제가 상당히 발달하여 능숙한 말솜씨로 둘러대기를 좋아했으며, 때로는 거짓말도 서슴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케네디와 닉슨의 정치적 이력을 어느 정도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케네디는 위대한 대통령, 성공한 대통령으로 불리며 미국인들의 가슴에 늘 살아나 영감을 주는 대통령이 된 반면, 닉슨은 실패한 대통령, 교활한 딕, 더럽고 거짓말쟁이인 대단히 위험한 인물 등으로 평가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대통령이 되기 전의 정치적 이력은 닉슨이 케네디보다 더 화려한데 말입니다. 

 

 정치적 경험(이력)을 보면 케네디는 상원 의원이었지만, 닉슨은 부통령을 두 번이나 역임하는 베테랑 정치인이었습니다. 이런 정치적 이력을 보면, 닉슨이 케네디보다 압도적입니다. 거기다가 종교적으로도 케네디는 당시 미국 사회에서 선호하지 않는 가톨릭교도였지만 닉슨은 선호하는 신교도였습니다. 둘 다 열심히 공부한 엘리트지만 학업 성실성의 측면에서는 닉슨이 한발 앞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전국적인 유명세로 닉슨이 앞섰습니다. 모든 영역의 경험과 이력에서 닉슨이 케네디를 앞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미국인들은 케네디를 선택하였으며 케네디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았고 닉슨은 실패한 대통령으로 남았을까요?

 

그것의 가장 큰 이유는 오바마의 말대로 그 성품의 차이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케네디는 항상 미남형의 깔끔한 스타일에 정직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나, 닉슨은 덥수룩한 모습에 일에 치여 지내면서 ‘교활한 딕’이란 별명이 붙은 것처럼, 정직하지 못한 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케네디의 말은 시종 일관성이 있었으나, 닉슨의 말은 필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으며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총동원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 닉슨은 케네디가 ‘더럽고 거짓말쟁이인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라고 한 것처럼 워터게이트 사건 등에서 보여 주듯이 다소 음흉하고 거짓스러운 권위에 빠졌습니다. 

 

둘은 말을 잘했습니다. 하지만 케네디의 말은 군더더기가 거의 없는 명쾌한 모습이었으나, 닉슨의 말은 수사가 많았습니다. 특히 자기의 결점 등에 대해서는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요. 닉슨은 아마 부통령까지 하면서 권력의 타성에 젖어 권위와 권력의 자아도취에 어느 정도 빠져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임 기간의 의사결정 방식에서도 케네디는 항상 소통하며 충분한 토론을 통한 명쾌하고 과감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반면 닉슨은 권위와 힘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지요. 특히 자기의 결점과 문제에서는 철저하게 변명하며 권위의 힘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 가장 극명한 사례가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보인 태도였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의혹이 터지자 닉슨은 변명과 함께 힘으로 덮으려 했고, 그것은 미국인들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오바마의 말대로 둘의 성격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 아닐까요? 

 

케네디와 닉슨의 사례를 보면 분명한 것은 경험(이력)이 정치적 리더십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미국 역사에서 미국인들이 화려한 경력의 닉슨이 아닌 케네디를 선택한 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에게서 보이지 않는 정말 중요한 것인 사람의 마음, 성품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4.10 총선을 앞두고 거대 양당에서는 ‘물갈이 공천’으로 타성에 빠진 구태 정치인이 아닌 참신한 정치인을 영입하여 공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사람 심기 공천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넘칩니다.

 

 그런데 거기에 박지원, 정동영, 김무성 등 ‘올드 보이들의 귀환’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 국민은 그 옛날 미국인들이 경력과 이력이 화려한 닉슨이 아닌 케네디를 선택한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것’ 이를테면 후보자의 성품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성품을 이루는 것은 정직성, 당당함, 명쾌한 소통력, 자기의 결점과 문제에 대한 변명이나 은폐가 아닌 솔직 담백함과 혁신성 등이라고 여깁니다. 분명한 것은 정치적 경험과 이력보다 후보자의 성품과 철학과 비전, 솔직한 소통력, 나아가 말의 일관성일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위대한 유권자들의 현명한 선택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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