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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학 수필] 그 겨울, 화투(花鬪)의 미학(美學)
정재학 칼럼니스트   |   2024-02-07
▲ 정재학  시인, 칼럼니스트  

 건전한 놀이문화라기보다는, 노름이라는 전형적인 패가망신의 도구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 바로 화투다. 화투는 한자말로는 꽃싸움(花鬪)이라는 뜻으로, 일년 12월을 숫자로 정하여 매월마다 상징하는 꽃이나 사물을 종이에 그려 넣은 것이다.

 

화투는 그 기원은 장희빈 시절 그녀의 숙부 장현이라는 이가 감옥에서 심심풀이로 만들어 즐기던 것이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가 소개해서, 결국 일본에서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화투는 일제강점 하에서 매우 성행하였던 것으로 일본이 조선인들의 성실성 및 애국심을 없애기 위해 장려했다고도 한다. 특히 농한기철인 겨울에 극성을 부려서 화투 노름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재산을 잃고 유리걸식하던 가족을 나도 어려서 본 적이 있다.

 

화투로 인해 민족성까지 해친 예로 화투가 유행하던 고을마다 전통적인 근면성실한 삶보다는 한탕주의가 성행하고 배금주의로 인한 정신적 가치의 몰락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노름에 진 자는 충격으로 일을 하지 못했고 그리고 가정파탄으로 인한 가족 해체는 자녀들의 성장에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켰다. 오죽하면 아내와 자식을 판 자도 있을 것인가.

 

그런 화투에 내가 한 겨울을 몽땅 보낸 적이 있다. 신혼 초였다. 겨울방학을 본가에서 보내며 부모님을 모시던 나는 그 해 겨울에도 고향으로 갔다. 인사를 드리고 저녁밥상에 우리 가족이 모인 순간 나는 어머님께 이상(異狀)이 생겼음을 즉감하였다.

 

흐릿한 눈빛, 그리고 기억을 못하는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대화 도중에 알아차린 것이다. TV 연속극을 보다가도 이미 지나간 사건의 연결고리를 놓치고, ‘저것들이 왜 저러냐’며 물으시는 어머님은 치매 현상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안 나는 고민하였다.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 걸까. 치매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다.

 

화투를 치기로 했다. 화투는 어머님의 유일한 낙이었다. 동네아주머니들과도 종종 이 화투놀이를 하시곤 하던 어머님은 읍내로 이사를 오자 놀아줄 벗이 없이 지내셨다고 하셨다. 그래서 하루 종일 잠이나 자는 생활이 이어지자 정신력이 그토록 감퇴되어 치매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었구나.

 

▲ 화투놀이     ©

 

“화투칩시다, 어머니.”

 

우리는 그 해 짧은 겨울 동안 아침밥 먹자마자 시작해서 밤 10시까지 화투를 쳤다. 화투 종류는 육백과 삼봉이 섞여진 것이었다. 화투에는 가장 기본적인 민화투가 있고, 조금 나아간 것이 육백이다. 점수로 육백을 나면 이기는 게임. 그리고 화투패 중 같은 것이 석장 들어오면 3백을 점수로 주는 삼봉. 바로 고스톱 이전의 화투놀이 종류들이었다.

 

열심히는 치지만,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이길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약을 해도 세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기 일쑤였다. 나는 그 약을 세어주지 않았다. 단 돈을 다 받고 난 뒤, 무슨 약을 못 세었다고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이고, 그 놈만 세었으면 돈 따는 것인데.”

 

하시며 땅을 치는 것이었다.

 

30여 년 전 돈 가치로, 시골 노인네가 화투쳐서 만 원짜리 몇 장을 잃었다면 얼마나 속이 상했을 것인가. 쌀 한가마니에 5만원 하던 시절이었다. 고작 십 원짜리로 화투를 치던 시절에 어머님은 하루에 몇 만원씩 잃었던 것이다. 애가 타게 화투장을 들여다보아도 어머니의 판단력이나 기억력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외우고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해도 결국은 잊고 말았다. 아내가 옆에서 도와주려고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내는 화투의 ‘화’ 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한번은 흑싸리 석장이 들어왔나 보다 열을 받은 어머니가 외우기 시작했다.

 

“흑싸리 삼봉, 흑싸리 삼봉….”

 

안 잊기 위한 어머니의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훼방을 놓았다.

 

“아따, 시끄럽구만.”

 

그 소리에 잠잠하던 어머니는 결국 그 흑싸리 삼봉을 잊고 말았다. 역시 딴 돈을 다 받고 가르쳐 주었을 때, 어머니는 눈에 불을 켰다.

 

“ 아이고, 그놈만 세었으면….”

 

가슴도 서너 번 쳤을 것이다.

 

아내에게는 이미 엄하게 단속을 해 놓았다. 절대 돈 빌려주지 말 것과 도와주지 말 것을 신신당부해 놓았다.

 

맨 처음에는 그 꼴을 보고,

 

“당신도 선생이유?”

 

하던 아내도 내 의향을 알고부터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딴 돈은 모두 그날로 써버렸다. 그땐 사는 곳이 고창읍내였기 때문에 매일시장이 있었다. 아내를 시켜 시장을 봐오게 하였다. 밥상이 항상 진수성찬으로 그득했다. 나는 밥을 먹으면서도 어머님 성을 돋우었다.

 

“잘 먹을 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얼마나 미웠을까. 지금도 어머님 흘기던 눈사위를 잊지 못한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갔다. 어머니 수중에 돈이 떨어지고, 드디어 돈을 달리기 시작했다. 아마 아버님께도 얼마간 돈을 꾼 모양이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나는 들볶기 시작했다.

 

 

“돈 언제 줄 거유?”

 

“줄게, 금방. 어휴 그나저나 이놈의 패가 왜 이렇게 안 맞어?”

 

“안 주면 안 해요.”

 

“준다니까. 어서 패나 잡어.”

 

그러던 어머니가 어느 날 아침 식사 후에 어딜 간다 온다 말 한마디도 없이 밖으로 나가셨다. 처음에는 볼일이 있어서 나간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곧 돌아오시겠지 하였지만, 점심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죄 없는 어머니 그렇게 들볶는 게 어디 있어요.”

 

아내도 모르고 있었다. 이리저리 연락해 보았지만, 종적이 묘연했다. 그렇게 오후 4시가 될 무렵이었다.

 

“아나, 네 돈!”

 

어머니가 씩씩하게 들어오시더니, 돈을 방바닥에 던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시골집에 들러서 방앗간에다 맡겨놓은 식량 중에 나락 몇 가마니를 팔아가지고 온 것이었다. 2만3천원이었던가, 그 돈을 갚고도 십 몇 만원이 남았던 모양이다. 나는 그 돈을 목표로 또 화투를 쳤다.

 

그 돈도 거의 떨어질 무렵, 방학은 20일이 훨씬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다리 관절이 쑤시고 아플 무렵, 어머니는 내 돈을 따가기 시작했다. 속일 수도 없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화투를 치기 시작한 지 보름여. 어머니는 기억력을 찾고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 말처럼 어머님이 화투 약을 못 세고 있을 때, 그 약을 세어서 어머님께 돈을 드렸더라면, 오늘의 어머니는 없었을 것이오. 효도란 당연히 당신이 지금 하는 것처럼 잘 먹여 드리고 잘 입혀 드리는 것이오. 그러나 진정한 효도는 어머님을 얼마나 오래 더 살게 하는가, 얼마나 건강하게 오래 사시게 하는가. 그것을 지켜 드리는 일일 것이오.”

 

아내가 그 당시 연탄불을 때던 시절, 밤이면 어머니 방, 요 밑에 손을 넣어 온도를 재고는 연탄불 보기를 하루 저녁 몇 번씩이나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겨울방학 일을 겪은 아내는 효에 대해 새롭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머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20여년이 넘도록 기억을 못하는 일이 없었다. 나중에 모든 걸 말씀드리자, 어머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았고, 그 이후 두 번 다시 넋을 놓고 살지 않으셨다. 항상 무엇인가 일에 몰두하고 그리고 작은 노동이라도 손에 놓지 않았다.

 

그렇게 건강하게 사시다가, 어느 11월 겨울이 오는 오후 4시 무렵에 낮잠을 주무시는 잠자리에서 돌아가셨다. 참으로 고요한 영면(永眠)이었다고, 아버님은 말씀하셨다. 화투의 덕(德)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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