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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석 수필] 젊은 날의 초상, 시오리 솔밭길
이동석 칼럼니스트   |   2023-11-28
▲ 이동석 칼럼니스트 , 경영학 박사

1. 일탈(逸脫)의 기억

46년전인 1977년 여름, 나는 청송 보현산 자락의 청룡사라는 절에 머물고 있었다. 보살할매라 부르는 나이 든 여자 스님 한 분만 있는 아주 조그만한 태고종 사찰이었다.

 

사실 난 대학 4학년 1학기를 마치자 마자 휴학계를 내고, 행정고시 준비를 하는 법대 친구를 따라 그의 고향 근처인 이곳으로 도망치듯 떠나 왔다. 지겹게 따라다니는 권태감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나머지, 남은 한 학기를 군 제대 후로 미루고 공인회계사 시험 준비한다는 핑계로 그 따분한 잿빛 도시를 가까스로 빠져 나온 셈이었다. 

 

우리는 절 맞은편 절벽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작은 암자에 기거하였는데, 암자라야 2명이 겨우 누울 정도의 손바닥만한 방 1개와 바위 틈새로 똑똑 떨어지는 옹달샘만 달랑 있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밥은 주위에 널려 있는 솔가지로 불을 지펴 해먹고, 용변은 산모퉁이 뒤편 적당한 곳에서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낮에는 새소리, 밤에는 바람소리뿐, 주위는 항상 고요했다. 밤에 가끔씩 들리는 범 울음소리를 제외하고는~ 

 

▲ 맞은 편 암릉에서 바라본 전경. 우측 바위벽 중간에 단서굴이 보인다 그 오른쪽 나무 가려진 부분이 암자가 있던 곳     © 이동석 칼럼니스트

 

그러나 5일마다 열리는 장날은 오랜만에 국밥과 막걸리로 배를 채울 수 있는 잔치날이었다. 장터까지는 약 15리 정도라 아침부터 부산하게 채비를 하고 휘파람을 불면서 암자를 나서 오후쯤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오곤 했다.

 

마침 그 당시 진송남씨의 '시오리 솔밭길' 이란 노래가 발표되어 오가는 장터길에 흥얼거렸다. 돌이켜 보면, 술에 취한 채 어떻게 길도 없는 바위 절벽을 올랐는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것도 반바지에 고무신 차림으로~

▲ 암자 올라가는 절벽 정상부근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암자가 나온다     © 이동석 칼럼니스트

 

2. 미몽(迷夢)의 끝

지난 여름, 그 추억의 현장을 갔었다. 장터가 있는 도평버스터미널에 내려 청룡사가 있던 월매리까지 예전처럼 터벅터벅 걸어갔다.

 

▲ 월매리 마을 입구 표지판앞     © 이동석 칼럼니스트

 

하지만, 소나무가 우거졌던 시오리길은 아스팔트 도로로 변해 있었고, 담배와 고추밭이 이어졌던 월매 마을도 이제 대부분 사과밭으로 채워져 정겹던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더욱 놀랍게도 당시의 청룡사는 사라지고 대신 용암사라는 절이 새롭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때 기거했던 절벽위 암자도 아쉽게 철거되어 지금은 암벽등반 매니아들이 가끔 부근을 지나갈 뿐이라고 했다. 

 

마을에서 거의 평생을 사신 88세 할머니로부터 약간의 소식을 더 접할 수 있었다. 청룡사 보살할매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풋고추를 안주삼아 깡소주를 나눠 마셨던 마을 청년들도 대부분 도회지로 나갔다고 했다. 옛 사람들도 떠나간 46년의 세월 무상은 그 곳을 더욱 낯설게 느끼게 하고 있었다. 

 

▲ 용암사 들어가는 길, 길옆에 옛 스님의 부도탑이 보인다     © 이동석 칼럼니스트

 

도평리에서 월매리에 이르는 아늑하고 평화롭던 풍경들은 그렇게 내 기억속에서 사라져 갔다. 그 시절, 공부는 뒷전이고 철없이 방황하던 젊은 날의 내 모습이 희미하게 오버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느 젊은 날과는 달리, 내가 진정으로 가슴 저려하며 품고 갈 게 무엇이었을까? 

꿈같은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한번 '시오리 솔밭길' 을 나지막하게 되내어 본다. 이번에는 수년 전 먼저 가신 어머니를 그리면서~ 

 

"솔바람 소리에 잠이 깨이면

어머니 손을 잡고 따라나선 시오리길

학교가는 솔밭길은 멀고 험하여도

투정없이 다니던 꿈같은 세월이여

어린 나의 졸업식날 홀어머니는

내 손목을 부여잡고 슬피 우셨소

산새들 소리에 날이 밝으면

어머니 손을 잡고 따라나선 시오리길"

 

3. 귀로(歸路)에서

돌아오는 시오리길, 아련한 상념에 빠져 걷고있는 바로 뒤에서 크락션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트럭을 운전하는 노인이 말을 걸어왔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괜찮으시면 태워 드릴께요"

무더운 날씨에 지쳐있던 나는 이게 웬 떡이냐 싶어서 냉큼 조수석에 올라탓다.

"도평까지 가는데~ 감사합니다" 

 

▲ 용암사에서 바라본 암자있던 곳. 뒷편 상단부근 나무에 가려져 있다     © 이동석 칼럼니스트

 

금년에 우리 나이로 80살이 된다는 이 분은 일찍 고향을 떠나 도회지에서 떠돌다가 16년전쯤 귀향해서, 현재 세 형제 가족이 한 마을에 모여 과수원을 하며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차를 타고 가던 중, 내가 대구에서 여행왔다고 하니, 그럼 바람이나 쐬려 드라이브나 함께 하자고 하여 생각지도 않은 동행을 더하게 됐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보현산 주변을 돌아보다가 그 분의 자택을 방문하고 깜짝 놀랐다. 집 전체가 온갖 꽃, 나무, 다육식물을 비롯하여 도자기, 수석, 사진 그림 액자, 장식 소품 등으로 가득차 있어 가히 작은 박물관이라 할 만 했다. 더우기 거의 모든 물건은 버려진 것을 손수 수리한 재생품이며 직접 가꾼 화분이나 담금주는 필요한 사람들에 나눠 준다는 말을 들으면서 어쩌면 삶의 본질이나 의미를 관념적으로 찾기보다는 일상의 삶에 애정을 갖고 성실하게 실천하는 지혜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웬지 스스로 부끄러워졌다. 

 

비록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함께 있는 내내 유쾌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길옆에 늘어진 다래를 따서 맛보기도 했고, 잘 익은 자두로 갈증을 달래기도 했다. 휴게소가 있던 노귀재 옛길 드라이브를 끝으로 헤어질 때, 자신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직접 적어주는 그의 정성스런 글씨는 너무 아름다웠다. 

 

집에 돌아와 마누라에게 한마디했다.

"이번 여행에서 플라톤을 만났어"

"뮈요? 누구?"

"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에 나오는 농부 플라톤 있잖아, 맞아 틀림없이 플라톤같은 사람이었어"

 

4. 절망(絶望)과 희망(希望) 사이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그 시절을 다시 돌이켜 보면, 무기력한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마치 '고래사냥' 노래 가사처럼 안개속을 헤매고 있었던 모습이 내 젊은 날의 초상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헤매던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익명의 삶에 부끄럽지만, 유구무언(有口無言)일 수 밖에 없다.

 

▲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입구에 해당하는 용암사앞 계곡     ©이동석 칼럼니스트

 

그렇기에 불현듯 떠오른 그 시절 또 다른 장면을 회상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우리 시대의 자전적 연작 소설  '젊은 날의 초상' 을 쓴 이문열(본명 이열)은 대구 동인로터리에 소재한 공무원시험 준비학원의 국어 강사로 있던 그 해, 단편 소설 '나자레를 아십니까' 로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입선, 문단에 데뷔했다. 그리고 2년여가 지나 '사람의 아들' 로 대박을 치면서 이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당시 그 학원에서 영어를 강의하며 그와 종종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던 내 대학 선배는 이태 뒤 졸업과 함께 금융기관에 들어가 30여 년을 근무한 후, 지금은 새로운 인생 2막을 열어가고 있다. 

 

무릇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그래, 절망의 끝에는 희망이 보이는 법이다. 그 무렵 학원 봉급까지 가불해서 술마시며 보낸 이들의 젊은 날이 비록 어두웠을 지는 몰라도 나름 소중한 시간이었으리라. 이름하여《젊은 날의 초상, 1977년 **고시학원》이라고나 할까? ㅎㅎ

 

어쨌거나 그해 겨울이 지날 즈음엔 어두운 터널도 분명 끝나가고 있었다.

* 청룡사가 있던 월매계곡 일대는 칼데라 화산분지 지형으로 현재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 암자옆 절벽면에는 단서굴(丹書窟)로 알려진 3~4m 길이의 동굴이 있다. 

조선 말기 이응협(李膺協 1826 ~1894   호는 巷隱)의 유단서굴기(遊丹書窟記)에 의하면, 이 동굴은 조선 중기 학자이자 시인이던 고응척(高應陟 1531~1605, 호는 杜谷)이 임진왜란 때 피신한 동굴로 내부에 붉은 글씨로 대명일월(大明日月)이라고 쓰여 있는데 착안하여 단서굴(丹書窟) 또는 대명굴(大明窟)이라 칭하였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면, 외굴과 내굴 2개굴, 즉 외굴에서 백여보 거리에 막다른 내굴이 있고, 일부는 무너졌다는 기록으로 볼 때, 암자가 있던 곳도 예전에는 외굴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가 기거하던 당시 동굴에는 식별할 수 있는 글씨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상당량의 물만 항상 고여있어 세수나 설겆이 등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암자가 있던 곳을 포함한 이 구역은 지형상 접근하기가 워낙 위험하여 지금은 사실상 폐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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